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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폭탄, 문빠 그리고 디지털 문화

2017.05.30. [디지털산책] `문자폭탄`과 디지털 쌍방향 문화. 디지털타임스


문자폭탄, 문빠 그리고 디지털 문화


사건 1. 안수찬 전 한겨레21 편집장은 5월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일부 문대통령 지지자들의 과도한 글과 행동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담은 글을 올렸다. 음주 후 사적 공간에 남긴 글이기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면에 소개된 어떠한 뉴스보다 더 큰 관심을 끌었다.


사건 2.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있었던 5월 24일. 청문회를 진행하는 야당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이 쏟아졌다. 뉴스에 소개된 ‘문자 폭탄'의 내용을 보니, 질의 내용에 대한 반론, 질문한 의원이 과거에 행했던 사건 발췌, 그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 등이 포함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 발생한 디지털 문화와 관련된 대표적인 두개의 사건이다. 디지털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면서 불거지는 사례들은 새로울 수도 또는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 변화에 비해서 우리의 의식체계는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위의 사건은 디지털 시대의 시민 참여의 예로 저널리즘과 정치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우리나라의 기자와 정치인들이 디지털을 이해하는 정도는 김무성 의원이 ‘노룩 패스’가 “왜 이게 잘못된 것이냐. 그게 이상하게 보이더냐”라고 말한 것과 진배없다. 김의원은 늘 그렇게 해왔기에 가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얼굴을 마주하며 “부탁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를 말하는 것이 상식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자와 정치인이 여전히 엘리트주의와 계몽주의에 빠져 있는 동안, 대중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대리 만족’이나 리비스가 말하는 ‘대리 인생’에 대한 갈구를 끝내고 새로운 기술의 활용으로 자신의 실천적 삶을 당당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지한 스승'을 쓴 랑시에르는 그의 스승인 알튀세르가 지식인과 대중을 이분화하여 대중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랑시에르는 대중은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아닐 뿐더러,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구분도 없고,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기자와 국회의원은 독자와 시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해하기 쉽게 경제의 예를 들어보자. 디지털 혁신은 시장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소비자의 적극적 의견개진이다. 소셜 커머스에서는 후기가 있는 상품이 후기가 없는 상품보다 판매량이 서너배 이상 높다. 대표적인 배달 서비스 앱인 배달의 민족 앱 이용자 두명 중 한명은 후기를 보고 주문을 한다. 이러한 소비자의 적극적 참여는 기업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닭가슴살을 판매하는 한 업체는 “닭가슴살을 훈제해서 먹어보니 맛있더라”라는 고객이 남긴 구매후기를 보고 새로운 메뉴 개발로 월 2억의 매출을 올린다. 온라인 주문을 통해 구매한 과자가 배달 중 터져버린 사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글에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는 진심어린 댓글을 쓴 중소기업은 그 진성성에 감동한 소비자들로부터 오히려 매출액 증가라는 화답을 받기도 했다.


소비자는 구매를 할 때 이미 구매한 소비자의 평가를 대상으로 제품을 평가한다. 그리고 구매 후 나의 경험은 또 다른 댓글로 남겨져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이러한 평가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 그리고 소비자에 도움이 되는 건강한 시장을 만든다. 소통이 만드는 건강한 시장 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건강한 저널리즘과 정치 역시 동일한 생태계를 구성한다. 기업이 제품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듯이, 기자와 의원 역시 자신이 쓴 기사와 의회활동에 대한 무한 책임이 필요하다. 기자에게도 그렇고 의원에게도 그렇고, ‘문자 폭탄’은 뉴스소비자로서 그리고 정치소비자로서 행하는 정당한 시민운동이다. 간접민주주의적 대의제는 주권자인 시민을 대신해서 국회의원이 국가의사를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당연하게 국회의원은 자신을 뽑아 준 시민의 의견을 청취해야 하고 이를 적극 반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폭탄’은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시민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문자를 보내는데, 그 양이 많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 폭탄'이란 용어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며, 시민 정치에 대한 부정이다. 욕설이나 모욕 그리고 악의적 허위사실 유포는 의법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핑계삼아 정당한 시민의 의견개진을 싸잡아 가치절하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폭탄’이라는 표현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위협이자 시민에 대한 모욕이다. ‘문빠'와 ‘종북주의(자)’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실체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아직 많은 것들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온라인이 갖는 쌍방향성과 익명성, 확산력 등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특정 분야에서 기자보다 훨씬 더 잘 알 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뛰어난 시민은 넘쳐나며, 정치인보다 문제 제기와 대안 제시가 뛰어난 시민 역시 쌔고 쌨다. 받아쓰고 베껴쓰는 기자들의 설자리는 더 이상 없다. 정략을 꾀하고, 자신의 치부는 감추고 남의 약점을 침소봉대하는 정치인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기자와 정치인은 시민소통의 광장으로 들어와야 한다. 독자와 논쟁하고 시민과 대화해야 한다. “문자 보내는 것을 자제해주십시오"라는 말은 기자나 국회의원이 할 말이 아니다. 소통의 공간에서 설득해야 한다. 그게 실력이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은 높고 현명하며 강력하다. 시민의 의식을 의심하지 말라. 이것이야 말로 실추하는 저널리즘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고, 고질적인 정치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정동훈 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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