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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레지던시'로 디지털 국경 넓히는 에스토니아

2018.07.03. [테크 트렌드] 'e레지던시'로 디지털 국경 넓히는 에스토니아. 한경비즈니스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것보다도 작은 4만 5천 km2의 넓이에, 서울시 송파구와 강서구의 주민수를 합친 정도밖에 안 되는 130만 명의 인구수를 갖고 있는 소국. 유럽의 변방에 위치해 있으며, 발트 3국으로 불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듯한 국가, 에스토니아가 디지털 국경을 확장 중이다.

우리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대표적인 볼거리나 쓸거리가 없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도 탈린의 올드타운 전체가 1997년에 유네스코 중세도시로 선정될 만큼 중세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 전 세계 관광객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며, 외국어 또는 제2언어로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리고 교육하는 기관인 ‘세종학당’이 2015년 7월에 에스토니아 유일의 공과대학인 탈린공과대학에 설립됨으로써 최근 한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도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에스토니아는 ICT 업계에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방문을 하는 국가가 됐다. 세계 경제 포럼 선정 ‘기업가정신’ 1위, 글로벌 IT 리포트 선정 ‘모바일 네트워크 커버리지' 1위, 미국 세금 재단 선정 ‘OECD 조세경쟁력’ 1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선정 ‘디지털 경제/사회/행정 서비스 지수’ 2위, 프리덤하우스 선정 ‘경제자유지수’ 9위, 세계은행 선정 ‘사업하기 쉬운 국가’ 12위 등 셀 수 없이 많은 성과가 ICT 강국 에스토니아를 찾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비록 국가나 인구 규모와 같은 물리적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가 작지 않아 그들의 선례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혁신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e-에스토니아'가 갖고 있는 의미는 작지 않다. 최근에는 ‘e-레지던시’를 강조하며 국경조차 허물고자 하는 에스토니아와 비교해보면 여전히 규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e-레지던시’는 쉽게 말해 전자 영주권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에스토니아의 전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경 없는 디지털 사회를 만들었다. 이미 135개국에서 38,000명 이상의 전자 영주권자가 생겼고, 5,700개가 넘는 회사가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e-레지던시’ 신청자는 에스토니아 정부가 제공하는 디지털 ID를 받게 되고, 이것을 통해 신원 확인을 하며,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e-레지던시’를 통해 에스토니아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를 사용가능하다.

가장 큰 장점은 비즈니스이다. EU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무료로 제공되는 이러한 서비스를 통해 에스토니아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기업을 만드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고, 온라인으로 연결만 되어 있으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으며, 은행 계좌는 물론 신용 카드를 발행할 수도 있게 되니 EU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큰 장점이다. 매우 경제적이면서도 귀찮은 과정 없이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으니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도 한번 신청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신청 과정은 이렇다. 우선 온라인으로 신청을 한다. 신청비용은 100 유로. 개인 정보와 신청 이유를 간단히 적으면 대부분 승인이 된다. 승인 통보를 메일로 받으면 서울에 있는 발급센터를 방문해서 실물 ID 카드와 카드 판독기기를 직접 수령해야 한다. 이때 보안상의 이유로 지문 인식과 사진 촬영을 하게 되고 35,800원을 지불하면 에스토니아의 전자 영주권자가 되는 것이다.

지하자원도 없고, 자연환경도 열악한 에스토니아는 제한된 환경의 어려움을 이러한 혁신적인 제도를 통해 디지털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고자 한다. 전자 영주권자의 수가 늘고, 이들이 에스토니아를 기반으로 창업을 하게 되면 채용과 투자가 늘게 되며,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적으로는 세금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에스토니아라는 국가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으니 새로운 디지털 경제 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창업을 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 없이 온라인에서 몇 시간만 작업하면 그만이고, 매우 편리한 세금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까지 100% 세금 신고 자동화를 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기도 하다. 사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완벽한 세금 징수를 이루게 되니 국가 차원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e-레지던시’의 배경은 전자 ID 카드이다. 에스토니아는 2002년부터 전자 ID 카드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에스토니아 정부 서비스의 99%는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단지 결혼이나 이혼 그리고 부동산 취득과 관련된 것만 오프라인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인터넷은 사회적 권리(social right)’라는 이들의 태도에 있다. 에스토니아는 ‘e-솔루션'이라고 불리는 인터넷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프리덤 하우스에서 주관하는 인터넷 자유 지수 평가에서 늘 1, 2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애 한번만 등록하면 디지털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하여 디지털로 일을 처리하는데 문제가 없게 만든다. ‘e-레지던시’는 바로 이러한 디지털 개인 신원에 대한 권리를 전 세계인으로 확대한 것이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과감한 디지털 영토 확장을 선언한 것이다.

에스토니아 국민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e-에스토니아'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 원인은 보안 기술과 정부의 노력 그리고 실질적 혜택에 있다. 정부가 먼저 투명하게 모든 데이터를 공개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으며, 전자정부 시스템이 갖고 있는 장점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신뢰의 기반을 쌓았다. 무엇보다도 보안 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 전자카드와 X-road, 그리고 KSI 블록체인을 통한 3단계 보안 과정을 거치게 했다.

이러한 기술 발전과 함께 정부가 개인 정보를 잘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 법과 제도를 고쳤다. 누구라도 개인 정보를 보게 된다면 자동으로 이메일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만일 정부가 관리하는 개인 정보를 누군가 불법적으로 보게 된다면 이는 중대한 범법 행위로 다스려 졌다. 또한 인터넷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민관 협력을 통해 만든 교육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개인 정보 보안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함양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경제적 효과를 피부로 느끼게 했다. 디지털 서명은 GDP의 2%, 그리고 전자 선거는 2.5배의 비용 절약을 이루었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3분의 1로 줄었다. 세금 환급은 3일 만에 받게 되고, ID카드를 이용해서 대중교통을 사용하게 하니 사용자가 증가했고, 이는 수도 탈린의 대중교통을 무료로 제공하는 선순환을 이끌었다. 경제 활동을 위한 최고의 환경(zero-bureaucracy)을 이루기 위해 정부가 전념하는 것을 국민이 체감하게 만든 것이다. 1인당 GDP가 90년대 중반 5천 불에서 현재 약 2만 불까지 크게 뛰었고, IT 분야는 에스토니아 GDP의 7%(우리나라와 비슷)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으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난 20여 년간 높은 경쟁 성장률을 이룸으로써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됐지만, 이에 따라 부수적인 문제도 발생하기도 했다. 에스토니아가 직면한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뛰어난 인력 자원이라는 장점이 자국을 떠나 서구 사회에서 일하게 되는 국가적 차원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된 것이다. 자국어를 비롯해서 영어와 러시아어, 스웨덴어 등 많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어렸을 때부터 프로그램밍 언어를 배워서 높은 기술 수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기업의 선호가 높을 수밖에 없다. 에스토니아는 이러한 문제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e-레지던시’를 통해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만들려고 한다.

지난 6월 2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릴 예정이던 규제 혁신 점검회의가 회의 3시간 전에 '내용 미흡'을 이유로 연기됐다. 지지부진한 규제 개혁의 현실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에스토니아는 많은 점을 일깨워준다. 창업하기 쉽고, 경제활동하기 좋으며, 규제는 최소화하되 혜택은 많은 나라. 강대국에 쌓여있는 변방의 작은 나라가 대한민국에게 전하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정동훈 (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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